00.

01.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를 졸업하고 어느새 성인이 된 두 사람.
평소와 같은 날, 조금 뜬금없이 최근 안좋은 일이 많은 것 같은데. 같은 말이 나오며 시작되는 이야기. 쟈밀은 그런 카림을 힐긋 바라보았다가 어떠한 대답도 없이 손을 움직인다. 카림은 어떤 얘기를 들은 건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죽 늘어놓고, 쟈밀은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자신이야 이미 진작에 전달받은 것들이니 그다지 집중하고 있진 않았지.
뭐, 금지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 쟈밀은 그런 무던한 대답을 하며 괜히 창밖을 바라본다. 이 고리타분한 곳에서, 특히 돈 많은 이들이 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도련님께서는 모를 만도 하지요.
뭔가 대책을 마련해야겠어. 카림의 한마디에 쟈밀은 살풋 인상을 썼다가도, 알겠으니 오늘은 일단 해야 하는 일부터 끝내. 같은 반응을 내보일 뿐이었겠다. 카림의 성격과 행동력을 생각한다면 그래서는 안 됐던 걸지도 모르지만.
그날로부터 고작 3일 후, 쟈밀은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시종의 목소리를 듣게 돼. 그게, 도련님께서···!
그 말을 듣고 향한 곳에는, 이제 막 외출을 하고 돌아온 카림과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몇몇의 시종들 그리고 천으로 덮인 무언가
あ、ジャミル!ちょうどいいな。ちょっと手伝ってくれ。아, 쟈밀! 마침 잘 됐다. 좀 도와줘.
カリム!···坊っちゃん、一体何を···! 카림! ···도련님, 대체 뭘···!
쟈밀은 카림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며 그 옆에 있는 무언가를 힐긋. 아, 젠장 또 귀찮은 일을... 그런 쟈밀의 속도 모르고, 카림은 그저 해맑게 웃으며 곤란해 보여서 데려왔어! 라는 말을 한다. 외출했을 때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카림을 보며 한숨을 삼키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위험하니 그런 일은 직접 하지 마세요. 라고 할 때, 그것이 바스락 움직이는 듯싶더니...
새하얀 천이 흘러내리고, 희미한 빛을 받아 반짝이는 코랄의 눈동자를 마주한 쟈밀은 순간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만다. 카림의 목소리도 어쩐지 주변을 빙빙 맴돌며 아득해지는 느낌이었고...
겨우 정신을 차린 건 카림이 자신의 어깨를 흔들며 그러니까 쟈밀이 좀 도와줘! 라고 말했을 때였겠다. 이것 봐, 또...
뭐, 카림이 벌린 사건사고를 수습하는 거야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긴 했지만.
もう大丈夫だ。心配しなくてもいいさ。이제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카림은 무릎을 꿇어(그 자리에 있던 시종들은 도련님이 정체불명의 여자에게 그렇게까지 숙여주는 것을 보며 놀라긴 했지만) 자신이 데리고 온 이와 눈을 마주치고 아주, 아주 상냥한 목소리를 내. 그 다정함이 여자의 경계심을 풀진 못한 것 같았지만. 어쨌든, 카림이 먼저 들어가고 드넓은 홀에는 쟈밀과 시종 몇몇, 그리고 그 여자만이...
쟈밀 상, 어떻게 할까요···? 한 시종의 물음에 쟈밀은 작게 한숨을 내뱉고, 해야 할 일을 얘기해 주었겠다. 목욕이나 상처 치료를 위한 준비나 묵을 방을 정돈하는, 그런 일. 그리고 오로지 단둘만이 남았을 때, 쟈밀은 그제야 그것을 마주하는 거야. 여자의 등에서부터 뻗어 나온…
날개 다. 아직 천으로 덮여있긴 했지만, 그 실루엣은 누가 봐도...
새 수인족이라고 하더라도, 현대에 이르러서 날개가 남아있는 이는 거의 없는데... 그 희귀한 케이스를 마주한 쟈밀은 잠시 찌푸렸던 표정을 가다듬고는 조심스레 다가가.
歩けるのか?걸을 수 있겠어? 그 질문에 이름 모를 이는 쟈밀을 빤히 응시했지.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인지 가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쟈밀은 그것을 묵묵히 기다려줬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이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 그 고요한 응답에 쟈밀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ちょっと失礼する。잠시 실례하지. 그 한마디와 함께, 두 팔로 그이를 안아 들어. 순간 놀라 몸을 움츠리는 이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大丈夫だ。傷つけはしない。괜찮아. 다치게 하지 않아. 라고 소곤거려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새파랗던 하늘은 어느새 노을에 물들며 침침하게 가라앉고... 방에 도착하여 내려주기 전까지, 제 품에서 한순간도 긴장을 풀지 않는 걔를 힐긋 쳐다보며,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을 쟈밀 바이퍼 군.
그리고 쟈밀 바이퍼 군이 걔를 돌봐주게 되었다는, 그런 시시한 이야기.
이름 모를 이는 정말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이 고갯짓만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했고, 사실 의견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걔는 대체로 그냥 모든 것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목욕하고 나서 물 온도 괜찮냐고 물어봤는데 괜찮다고 해놓고 덜 데워진 찬 물에 목욕한 적 다수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다들 은연중에 말을 못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터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러니까 카림이 걔를 데려온 지 약 3개월 정도 지났을 때, 쟈밀은 평소와 같이 걔의 상처를 확인하러 잠시 방에 들렀고, 발목의 붕대를 풀어주며 희미하게 웃어주었지. 全部治ったな。전부 나았네. 그렇게 말하며 한 손에 전부 들어오는 걔의 발목을 쥔 채 가만... 괜히 복숭아뼈 근처를 손가락으로 문질렀을지도.
···あ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가, 감사합니다. 단둘만 있는 방 안에서 자그맣게 울리는 목소리에 쟈밀은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예상치 못한 반응에 걔도 어깨를 움찔.
声··· ···はい? あ、いや。何でもない。목소리··· ···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쟈밀은 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방에서 나가 잠시 문 앞에 가만히 서있었겠다. 말, 할 수 있었구나. 그런 생각과 함께 제 머리 위에서 울리던 그 목소리를 다시 곱씹었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리고 걸음을 옮기며, 이름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터다.
샤한이라는 이름을 듣고 잘 어울린다고 웃어주었던 건 조금 나중의 이야기
02.
사람들이 오해를 할 정도로 입을 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걔는 목욕물에 발을 담갔을 때 찬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도 작은 신음 하나 흘리는 일이 없다. 그저 잠시 고민하다가 발을 돌려 벗어두었던 옷을 다시 걸치고는 문쪽으로 향해. 슬쩍 문을 열면 틈 사이로 사용인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만이 보이고. 그러고 보니, 중요한 손님이 온다고 했던가.
오늘 아침에 주워들은 이야기를 상기하며 복도를 가만히 바라보던 걔는 조심스레 문을 닫아. 대충 걸쳐두었던 옷을 다시 벗고는 발을 옮기고...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로 차가운 물에 몸을 담갔겠다.
평소보다 빠르게 씻고 나와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칼을 말릴 생각도 않고, 샤한은 곧장 방으로 향하는 거야. 어쩌다 그 장면을 발견한 쟈밀 군은 기겁한 얼굴로 걔를 멈춰 세워. 베개랑 이불을 전부 적실 생각이냐며 잔소리를 하려던 쟈밀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어깨와 평소보다 창백한 입술을 가만...
너···. 쟈밀이 입을 뗀 그 순간에, 멀지 않은 곳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와. 작은 탄식을 내뱉은 사용인 중 한 명은 급히 샤한에게로 다가오더니, 세상에, 목욕물 데워두는 걸 깜빡했네. 설마 벌써 다 씻은 거니? 같은 걸 묻는다.
샤한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 오히려 옆에서 듣고 있던 쟈밀 군이 당황해서는 그 찬물에 그냥 씻었다고?? 같은 생각을 했겠다. 열사의 나라의 더위를 이기기 위해 평소 아짐 가에서 마시거나 사용하는 물이 꽤나 차가운 편이기에 목욕을 할 때는 미지근하게 데우는 게 보통인데...
할 말이 많은데,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사실 걔가 제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도 알 수 없어서 결국 작은 한숨과 함께 일단 머리부터 말리자는 얘기만을 꺼내던 쟈밀 바이퍼 군.
샤한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주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금발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쟈밀은 그제야 입을 뗀다. 次からはちゃんと言え。カゼひいたらどうする。다음부터는 똑바로 얘기해. 감기 걸리면 어떡하려고. 자신의 차분한 목소리에 희미하게 깔리는, ...... 쟈밀은 순간 멈칫.
그의 손이 멈추면, 걔는 눈동자를 굴려 슬쩍 쟈밀을 바라보는 거다. 거울 너머로 시선이 마주치고,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그 애에게 いや、何でもない。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대답해주었겠지.
그리고 오로지 정적뿐이다.
그날로부터 이틀 뒤, 감기에 걸린 샤한이겠다.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원래부터 몸상태도 안 좋았으니까 당연하지··· 같은 생각을 하며 걔의 방에 들어가는 쟈밀 바이퍼 군. 가뜩이나 카림의 일로 바쁜데 구태여 이곳에 왜 들렀냐면, ......
그러게. 왜일까. 쟈밀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 애의 이마에 가볍게 손을 툭. 자신의 손길에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바르작거리는 걔를 가만 바라보다 문득 깨달아. 날개 때문에 옆으로 돌아누워 있는 거구나, 하고. 샤한이 자는 걸 보는 것도 처음이고,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지금에서야 눈치채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 평소보다 갈라지는 열기 섞인 숨소리만이 고요한 방에 울려 퍼지고....
그러니까, 너는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거야.
아, 또 이 꿈이다. 어렸을 적에, 그러니까... 몇 살이었는지는 모른다. 당연하다, 버려진 아이였으니까. 기억나는 거라고는 자신을 둘러싼 이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그런 쓸데없는 것뿐이다. 경멸, 혐오, 조소... 마치 새장에 갇혀 도망치지 못하는 새를 가지고 노는 것과도 같은 태도. 그리고 그 애는 언제나 철창을 사이에 둔 것처럼 타인을 바라봤다. 새장은 온 사방이 뚫려 있으니까, 그 안에 갇혀있다고 해서 밖을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사실, 그 애도 똑같은 표정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경멸, 혐오, 조소... 정말이지, 지루한 것들 투성이. 걸을 수 없을 만큼 부어오른 제 발목을 보면서도, 샤한은 그런 생각만을 했겠다. 상냥하게 웃는 남자를 봤을 때도, 그가 도와줄 테니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했을 때도, 그저 태양 아래 똑바로 서있는 것이 버거웠다.
굳어버린 날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평생을 새장 안에서 살아왔으니, 날아가는 방법 따윈 배우지 않았다. 다만, 샤한은 빛이 맴도는 회색의 눈동자를 마주친 그 순간에... ...
···起きたのか。···일어난 건가. 깜빡, 눈을 뜨면 조금 낮은 목소리가 울려와. 느릿느릿 숨을 내뱉고, 손으로 눈을 몇 번 비비고 나서야 쟈밀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지. 뭐랄까, ...가깝지 않아?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샤한은 퍼뜩 그가 자신을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거야.
날개도 함께 움직이는 탓에 걔가 놀란 걸 금방 알아차린 쟈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지. 굳어버린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에 슬 힘을 풀고, 잠시 제 손으로 샤한의 이마를 덮는다. うん、熱はだいぶ下がったな。調子はどうだ?응, 열은 꽤 내렸네. 몸 상태는 어때?
샤한은 여전히 입을 여는 일 없이 고개만 위아래로 움직일 뿐이었지만, 쟈밀은 그런 애매한 대답도 알아들은 듯 했지.
그리고 또 정적. 그렇지만 평소와 조금 다른 것이 있다고 하면, 귓가에 울리는 심장 박동 소리일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자그마한 소음. 샤한은 저도 모르게 쟈밀의 가슴팍에 고개를 툭. 제 피부 위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있다. 물수건으로 열이라도 내려주고 있던 걸까. 그 덕에 전보다 훨씬 편한 느낌이야.
날개,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지, 샤한은 쟈밀의 목소리에 느릿느릿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올려다본 쟈밀은 날개를 이루고 있는 깃털을 만지작거리는가 싶더니, 그 손길이 끝내 향하는 곳은...
痛くはないのか?아프지는 않아?
손가락 끝이 등 위에서 미끄러지는 감각이 낯설다. ...간지러울 정도로 조심스러운 움직임.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쟈밀은 평소에는 날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던, 불거진 등뼈를 따라 손을 움직인다. 그리고 제 품에 가만히 안겨있는 그 애를 힐긋.
처음 만난 날에는, 한 번도 긴장을 풀지 않았지. 금방이라도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어 하는 느낌이었는데... 아주 조금은, 닿게 된 걸까. 아무리 손을 뻗어도, 어딘가로 날아갈 수 있는 날개가 아닌 자신의 것보다 더 뜨겁게 느껴지는 체온만을 붙잡을 수 있겠지만.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쟈밀에게 가벼운 바람이 살랑. 퍼뜩 정신을 차리면 샤한의 날개가 움직이고 있어. 아마 아프지 않냐는 그의 질문이 감기에 대한 것이 아님을 눈치챈 그 애 나름의 대답이었을 터다.
그럼 쟈밀은 희미하게 웃고서 그제야 샤한을 제 품에서 놓아주는 거다. 약은 잊지 말고 먹으라는 말까지 남기고서야 방을 떠난 쟈밀 바이퍼 군. 그리고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문을 바라보고 있었을 샤한.
사실 이때(02 시점)는 아직 쟈밀 군이 샤한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을 때라서... (모르는 이유: 초반에 이름이 뭐냐고 물었는데 걔가 안 알려줌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알려주려나 아니면 이름이 없을지도 그럼 계속 묻는 것도 좀 실례인 거겠지 <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다가 시간이 흐르고 지금 여기! 상황) 사실 머릿속으로 몇 번 그 애의 이름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었겠다 그리고 조금 멋대로 이름 후보 만들어 두기
샤한을 데리고 온 건 카림이고, 원체 다정한 편이니 샤한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을 것 같은데... 어쩌다 카림과 쟈밀 둘이서 샤한의 이름에 대해 얘기하는 날도 있었다 이런 이름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 아아, 확실히. 이런 대화 나누다가 퍼뜩 뭐하고 있는 거지 싶어서 이제 잡담 그만하고 빨리 서류 처리하라고 잔소리하는 쟈밀 군(쟈밀도 방금 전까지 열심히 얘기했으면서~!!)
나중에 걔한테서 샤한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걸 들었을 때는 그게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을 테고.
문득 생각난 이 장면에서부터 시작된 AU 그냥... 정원에서 산책을 하고 있던 샤한을 찾아간 쟈밀 바이퍼 군. 이제 상처도 다 나았고, 자신을 보면 자그맣게 미소 지어주는 그 모습이 싫지 않아서... 그래서 꽤 자주 샤한을 만나러 갔을 것 같겠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나누게 된 둘 그리고 쟈밀은 항상 궁금해하던 것에 대해 질문했을 터다.
シャハン、飛べるのか? 샤한, 날 수 있어? 그의 질문에 샤한은 쟈밀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 그리고 그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더니,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펼친다. 날개는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바람을 일으키고, 샤한의 새하얀 옷자락이 흩날리는 동시에 그 발이 땅에서 떨어진다. 허공을 딛어 금색의 머리카락이 태양의 빛을 받아 반짝이고, 사막의 공기는 숨이 막힐 듯이 뜨겁다.
그리고 쟈밀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애를 붙잡았다.
어째서? 손바닥에서부터 전해지는 온기와 살랑이는 머리칼이 제 손등을 간지럽히는 감각은 낯설기 그지없고.
샤한은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심했고, 자신도 그걸 알기에 이제껏 멋대로 닿는 일이 없었는데... 그런데 왜, 지금은 참지 못하고 샤한을 잡아버리고 만 건지. 悪い。쟈밀은 조금 갈라지는 목소리로 사과를 내뱉고서 샤한의 손목을 놔주었겠다.
그런 그의 행동에 샤한은 그저 조용히 다시 지상에 발을 붙인다. 그리고 조금 생각이 많아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는 쟈밀을 올려다보다가, 소리 없이 옅게 미소짓겠다. 걔는 작은 목소리로, これしか··· 중얼. 그 말을 이해하는데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그 정도밖에 날지 못한다고? 쟈밀의 말에 샤한은 고개를 끄덕. 하긴, 새처럼 날 수 있었다면 누군가에게 붙잡히거나 도망치지 못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을 터다.
다만 쟈밀은, 마치 장식품처럼 아무런 쓸모도 없이 아름다운 그 날개를 바라보며 아주 조금은, 그러니까, 샤한이 아무 말 없이 하늘로 날아가 사라지는 그런 일은 없겠구나 싶어서... 안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날지 못해 어디에도 도망갈 수 없는 새는, 새장 안이 가장 안락한 걸까. 답은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일단 지금은 샤한이 웃어주고 있으니 괜찮을 것 같다고, 그런 안일한 마음으로 제멋대로의 해답을 내리고야 마는 거다.
제목을 통해 어느 정도 눈치채셨겠지만 이 AU는 이카로스의 날개 신화를 모티브로 삼고 있어요 날개가 녹아버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불구하고 태양으로 향하던 이의 어리석음, 욕망, 무절제... 그래도 신화와는 다르게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요 왜냐하면... 사귀는 거 보고 싶어서 짠 거니까 아무래도
이 AU에서 쟈밀과 샤한 둘 다 이카로스인 동시에 태양입니다. 닿고 싶은 것이 있었고, 그렇기에 동경하고 욕망하며 빛나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
이런저런 설정을 말하자면, 일단 쟈밀 군이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를 졸업한 지 이제 겨우 1~2년 정도 된 시점이에요 당연히 고등학생 때보다 더 많이 성장하고, 여유로워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갈증이 존재합니다 아직 혼자서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거든요 자신이 그렇게 바라던 온전한 쟈밀 바이퍼만의 시간을, 세계를 경험하지 못했기에...
해야 하는 일에 사적인 감정을 섞지 않으려고 하는 편이고, 바이퍼의 이름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니 카림이 무슨 말을 하든 모든 걸 팽개치고 떠난다는 선택지를 고르지 않았을 쟈밀 군일 거예요(전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며 자기 자신만을 위한 행동을 하는 건 한 번으로 족했으므로) 그렇기에 자신과 마찬가지로 학교 졸업 후 아짐 가의 차기 당주로서 전보다 더 바빠진 카림을 보좌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쟈밀 앞에 그 여자애가 나타나요 커다란 날개를 펼치면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치 자유를 형상화한 듯한... 그렇다면 그이를 손에 넣는다면, 자신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아주 순간의 착각일 테지요 그 애와 함께 지내는 시간 동안 쟈밀은 오롯이 「샤한」만을 바라봤을 거예요 어느 순간부터 쟈밀 군에게 걔의 날개는 더 이상 커다란 의미를 지니지 않아요 그래서 02에서 날개를 매만지며 그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샤한의 등을 확인하며 아프지 않냐고 물어본 거고...
여기서 시점을 넘기자면, 정확하게 그 순간 샤한 또한 쟈밀을 마주하는 자신의 마음을 명확하게 굳혔을 거예요 이제껏 샤한은 날개가 달린 조각상과도 같은 삶을 살았어요 그 날개가 아름다운지 추한지 떠들어대는 감상 또한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이었을 테지요 커다란 날개는 그 애의 전부를 감싸 숨겨버렸고, 온전한 「샤한」을 알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날개 안에 갇혀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는 역할 타인과 어떠한 상호작용도 일절 없이, 새장을 응시하는 시선을 받아들이며 마치 미술품-관객과도 같은 형태의 관계 그런 메마르고 지겨운 것들만이 존재하던 삶을 살아온...
그런 샤한에게 있어 쟈밀 바이퍼는 처음으로 「샤한」을 바라봐준 사람이기에, 의미가 없을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걔는 새장 밖으로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쟈밀 바이퍼는 절대로 이 좁은 곳에 갇힐 존재가 아니니까, 그를 똑바로 마주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움직이는 수밖에요
샤한에게 쟈밀은 미지에 대한 동경이고, 쟈밀에게 샤한은 닿고 싶은 욕망입니다
다만 쟈밀은 날개가 녹을 것을 알고 그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면, 샤한은 그와 반대로 전부 녹아 추락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부분에서 차이가 있겠네요
하염없이 떨어져 바다에 수장된다고 하더라도, 태양은 여전히 떠있는 법이니까